피렌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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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렌체 대성당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하여 건설을 시작했으나, 여러 건축가를 거치며 1436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혁신적인 이중벽 구조의 돔을 완성했다. 이 돔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석조 돔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대성당 내부는 로마 십자가 형태의 바실리카 양식이며, 내부에는 조토, 도나텔로, 파올로 우첼로 등 예술가들의 작품과 44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있다. 돔에는 현재 균열이 발생하여 지속적인 관찰과 보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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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의 종탑은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으로, 조토 디 본도네가 설계를 맡아 1334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다채색 대리석과 기하학 무늬, 조각상 등으로 장식되었으며, 현재 7개의 종이 있고 피렌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 피렌체 대성당 - 산 조반니 세례당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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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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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
다른 이름 | 피렌체 대성당 |
로마자 표기 |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Duomo di Firenze Cathedral Sanctae Mariae Floris |
위치 | 피렌체, 토스카나, 이탈리아 |
종파 | 가톨릭 교회 |
전례 | 라틴 교회 |
교구 | 피렌체 대교구 |
대주교 | 게라르도 감벨리 |
웹사이트 | 두오모 피렌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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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 연도 | 1436년 |
상태 | 대성당, 소 바실리카 |
건축 정보 | |
건축가 | 아르놀포 디 캄비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 |
건축 양식 | 고딕 건축 로마네스크 건축 르네상스 건축 |
착공일 | 1296년 9월 9일 |
완공일 | 1436년 |
전체 길이 | 153 미터 |
전체 너비 | 90 미터 |
네이브 너비 | 38 미터 |
최대 높이 | 114.5 미터 |
바닥 면적 | 8,300 제곱미터 |
사용 재료 | 대리석 벽돌 |
세계 유산 정보 | |
지정 유형 | 문화유산 |
지정 명칭 | 피렌체 역사 지구 |
지정 연도 | 1982년 (제6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
지정 번호 | 174 |
지정 기준 | i, ii, iii, iv, vi |
지역 | 유럽 및 북미 |
2. 역사
피렌체 대성당의 역사는 여러 세기에 걸쳐 진행된 복잡하고 흥미로운 건축 과정이다.
피렌체 대성당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63] 13세기 말, 조반니 빌라니의 기록에 따르면 900년 정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낡아서 무너지고 있었고, 인구가 급증하던 피렌체에 비해 너무 작았다.[64] 피렌체 시는 피사와 시에나에 새로 지어진 성당들에 자극을 받아 성 베드로 대성당,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을 필요로 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1296년에 새로운 성당을 설계했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키오 궁전의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세 개의 넓은 중랑(中廊)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도록 디자인했으며, 가운데 중랑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영역을 감싸도록 했다. 1296년 9월 9일, 피렌체에 파견된 첫 교황 사절이었던 발레리아나 추기경에 의해 첫 공사가 시작되어 140여 년간 계속되었다.
1302년 아르놀포가 사망하자 대성당 공사는 30년간 중단되었다. 1330년 성 제노비오의 성유물이 발견되면서 공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331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가 이 공사의 독점적 후원자가 되었고, 1334년에는 조토 디 본도네가 공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안드레아 피사노의 조력으로 조토는 캄비오의 설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조토의 주요 성과는 종탑 건물을 만든 것이다. 조토가 1337년 죽고 나서도 안드레아 피사노는 계속 건물을 만들었으나, 1348년 흑사병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1349년 대성당 공사가 재개되어 프란체스코 탈렌티는 종탑을 완성하고 전체 프로젝트를 후진(後陣)과 측면 경당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했다. 1359년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가 탈렌티의 뒤를 이어 가운데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었다. 그 밖에 알베르토 아르놀디, 조반니 담브로조, 네리 디 피오라반테, 오르카냐 등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1375년에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헐렸다. 신랑(nave)은 1380년에 완성되었고, 1418년에는 오직 돔만이 미완성 상태였다.
15세기 초, 피렌체 대성당은 원통형 부분까지 건설되었으나, 성단소 위 42m 넓이 공간에는 1367년부터 벽돌 모형이 존재했음에도 팔각형 돔(쿠폴라)이 없는 상태였다. 1419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는 대성당 돔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이 공모전에는 로렌초 기베르티와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주요 경쟁자로 참여했고,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 의뢰를 맡게 되었다.[65]
석재 돔 건설은 많은 기술적 문제를 야기했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의 거대한 돔에서 영감을 얻으려 했으나, 당시 콘크리트 사용법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벽돌로 돔을 건설해야 했다. 그는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의 도움을 받아 나무와 벽돌로 된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 모형은 현재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설 과정을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형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천재적이고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지붕 위가 아니라 드럼에 얹혀진 이중벽 구조의 팔각형 돔을 설계했는데, 이는 지면으로부터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도 돔 전체를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것은 홍예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었다.[65] 돔이 외부 지지대 없이 드럼에 얹혀졌기 때문에 수평 인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브루넬레스키는 돔 기초에 나무와 철로 된 수평 팽팽한 사슬을 만들어 돔의 안전을 확보했다.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1436년 3월 2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대성당을 축성(祝聖)하였다. 이 돔은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목재 지지 구조 없이 지어졌으며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돔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으로 남아 있으며, 르네상스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손꼽힌다.
브루넬레스키는 돔 위에 랜턴(돔 위의 위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첨탑)을 어떻게 올려놓을지는 의문시되었고, 그는 다른 설계경기에도 참가해야 했다. 그는 경쟁자인 로렌초 기베르티와 안토니오 차케리를 꺾고 설계경기에 당선되었다. 그는 사방으로 뻗은 버트레스와 여덟 개의 높은 아치 창(현재 대성당 부속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음)과 함께 있는 팔각형의 랜턴을 디자인했다. 랜턴의 건설은 1446년 브루넬레스키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15년간 공사는 조금밖에 진척되지 못했는데, 여러 건축가의 잦은 설계 변경 때문이었다. 랜턴은 브루넬레스키의 친구인 미켈로초가 1461년 결국 완성하였다. 원뿔 형태의 천장에는 도금된 구리 공과 십자가가 씌워졌는데, 성 유물을 포함하여 1469년 베로키오가 완성하였다. 대성당의 돔과 랜턴의 총 높이는 114.5m에 육박한다. 구리 공은 1600년 7월 17일 벼락을 맞고 떨어져 버렸다. 2년 뒤에 이 공은 더 큰 것으로 교체되었다.
바치오 다뇰로가 맡은 드럼 갤러리의 장식은 미켈란젤로의 반대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상은 대성당 광장에 있는 카노니치 궁전 바깥에 앉아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영원히 피렌체 전경의 중심이 될 돔을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보고 있다. 돔이 세워지고서 150년 이후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이 돔의 규모를 뛰어넘게 된다.
대성당 건물은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안으로 시작하여 1469년 베로키오가 랜턴 꼭대기에 구리로 된 구를 설치하면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전면은 19세기까지도 아직 미완성이었다.
외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성당 서쪽의 파사드(정면)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건설과 동시에 착공되었다. 캄비오의 사망 후, 그 설계를 바탕으로 한 파사드는 하부만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1490년대에는 이 파사드가 견고하지 않다는 보고가 있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 의해 파사드 재건이 제안되어 시민들은 이를 지지했고, 다양한 예술가에 의해 재건 안이 논의되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1587년에 메디치가의 토스카나 대공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명으로 건축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가 파사드를 철거했다. 이것은 프란체스코 1세가 구상한 피렌체의 도시 계획의 일환이었지만, 부온탈렌티가 디자인한 파사드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19세기까지 파사드는 미완성 상태였다. 피렌체 시의회는 최초의 구상을 바탕으로 파사드를 재건하기로 결정하여 1864년에 공모전이 실시되었고,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 설계에 의한 네오 고딕 양식의 파사드가 선택되었다. 이 공사는 1876년에 시작되어 1887년에 완성되었다. 구리로 된 거대한 문은 1899년부터 1903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2. 1. 초기 역사와 건설 배경
피렌체 대성당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으며,[63] 피사와 시에나의 새로운 성당 건설에 자극받아 건설되었다. 13세기 말, 조반니 빌라니는 900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붕괴되고 있었고,[64] 인구 급증으로 성당이 너무 작다고 기록했다.[64] 피렌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등에 필적하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다.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1296년에 새 성당을 설계했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키오 궁전의 건축가였다. 세 개의 넓은 중랑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고, 가운데 중랑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 영역을 감싸도록 설계했다. 1296년 9월 9일 첫 공사가 시작되어 140여 년간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되었다.
1302년 아르놀포 사망 후 공사는 30년간 중단되었다. 1330년 성 제노비오의 성유물 발견으로 공사가 재개되었다. 1331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가 후원자가 되었고, 1334년 조토 디 본도네가 감독하게 되었다. 안드레아 피사노의 도움으로 조토는 캄비오의 설계를 이어갔다. 조토의 주요 성과는 종탑 건물이다. 1337년 조토 사후에도 피사노는 계속 작업했으나, 1348년 흑사병으로 중단되었다.
1349년 공사가 재개되어 프란체스코 탈렌티는 종탑을 완성하고 후진과 측면 경당까지 확장했다. 1359년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가 탈렌티의 뒤를 이어 가운데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었다. 알베르토 아르놀디, 조반니 담브로조, 네리 디 피오라반테, 오르카냐 등도 참여했다. 1375년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철거되었다. 네이브는 1380년 완성되었고, 1418년 돔만 미완성 상태였다.
피렌체 대성당은 산 레파라타(성녀)에게 봉헌된 피렌체의 두 번째 대성당 자리에 세워졌다.[3] 첫 번째 대성당은 산 로렌초 대성당으로, 393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에 의해 봉헌되었다.[4]
1294년, 시 의회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새 교회 설계를 승인했다.[6] 그는 산타 크로체 대성당과 베키오 궁전의 건축가였다.[7][8]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는 세 개의 넓은 신랑을 설계했고, 가운데 신랑은 산타 레파라타 영역을 덮었다. 1296년 9월 9일 첫 돌이 놓였다.
1418년 8월 19일,[9] 아르테 델라 라나는 돔 건설을 위한 건축 설계 경쟁을 발표했다.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경쟁했고, 코시모 데 메디치의 지원을 받은 브루넬레스키가 승리했다.[10]
1420년 돔 건설이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1436년 3월 2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대성당을 봉헌했다. 임시 목조 지지대 없이 건설된 최초의 '팔각형' 돔이었다. 1436년 봉헌식에서 기욤 뒤파이의 모테트 ''누페르 로사룸 플로레스''가 연주되었다.
14세기 시작된 대성당 외관 장식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 작업 이후 미완성이었고, 1490년에서 1491년 사이 로렌초 데 메디치가 설계 경쟁을 시작했다.[12]
2. 2.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와 초기 건설
피렌체 대성당은 이전에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으며, 피사와 시에나에 새로 지어진 성당들에 자극을 받아 건설되었다. 13세기 말, 조반니 빌라니의 《신간 연대기》에 따르면 900년 정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붕괴되고 있었고, 인구가 급증하던 피렌체에 비해 너무 작았다. 번영하던 피렌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다.새로운 성당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1296년에 설계했다. 그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키오 궁전의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세 개의 넓은 중랑(中廊)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도록 디자인했으며, 가운데 중랑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영역을 감싸도록 했다. 1296년 9월 9일 첫 공사에 들어갔으며, 140여 년간 계속되었다.
아르놀포가 1302년에 사망하자 대성당의 공사는 30년간 미루어졌다. 1330년 성 제노비오의 성유물이 발견되면서 공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331년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 양모 상인 길드)가 이 공사의 독점적 후원자가 되었고, 1334년에는 조토 디 본도네가 공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안드레아 피사노의 조력으로 조토는 캄비오의 설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조토의 주요 성과는 종탑 건물을 만든 것이다. 조토가 1337년 죽고 나서도 안드레아 피사노는 계속 건물을 만들었으나, 1348년 흑사병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2. 3. 건설 중단과 재개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1302년에 사망하자 대성당의 공사는 30년간 미루어졌다.[64] 1330년 성 제노비오의 성유물이 발견되면서 공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64] 1331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가 이 공사의 독점적 후원자가 되었고, 1334년에는 조토 디 본도네가 공사를 감독하게 되었다.[64] 안드레아 피사노의 조력으로 조토는 캄비오의 설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64] 조토의 주요 성과는 종탑 건물을 만든 것이다.[64] 조토가 1337년에 사망한 후에도 안드레아 피사노는 계속 건물을 만들었으나, 1348년 흑사병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64]1349년 대성당 공사가 재개되어 프란체스코 탈렌티는 종탑을 완성하고 전체 프로젝트를 후진(後陣)과 측면 경당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했다.[9] 1359년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가 탈렌티의 뒤를 이어 가운데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었다.[9] 그 밖에 알베르토 아르놀디, 조반니 담브로조, 네리 디 피오라반테, 오르카냐 등의 건축가가 참여했다.[9] 1375년에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헐렸다.[9] 신랑(nave)은 1380년에 완성되었고, 1418년에는 오직 돔만이 미완성 상태였다.[9]
2. 4. 탈렌티와 다른 건축가들의 참여
1349년 대성당 공사가 재개되면서 프란체스코 탈렌티는 종탑을 완성하고 전체 프로젝트를 후진(後陣)과 측면 경당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했다.[64] 1359년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가 탈렌티의 뒤를 이어 가운데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었다.[64] 그 밖에 알베르토 아르놀디, 조반니 담브로조, 네리 디 피오라반테, 오르카냐 등의 건축가가 참여했다.[64] 1375년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헐렸고, 1380년 네이브(신랑)가 완성되었으며, 1418년에는 돔만이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64]2. 5. 돔 건설
15세기 초, 피렌체 대성당은 원통형 부분까지 건설되었으나, 성단소 위 42m 넓이 공간에는 1367년부터 벽돌 모형이 존재했음에도 팔각형 돔(쿠폴라)이 없는 상태였다. 1419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는 대성당 돔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이 공모전에는 로렌초 기베르티와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주요 경쟁자로 참여했고,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 의뢰를 맡게 되었다.[65]석재 돔 건설은 많은 기술적 문제를 야기했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의 거대한 돔에서 영감을 얻으려 했으나, 당시 콘크리트 사용법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벽돌로 돔을 건설해야 했다. 그는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의 도움을 받아 나무와 벽돌로 된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 모형은 현재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설 과정을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형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천재적이고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지붕 위가 아니라 드럼에 얹혀진 이중벽 구조의 팔각형 돔을 설계했는데, 이는 지면으로부터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도 돔 전체를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것은 홍예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었다.[65] 돔이 외부 지지대 없이 드럼에 얹혀졌기 때문에 수평 인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브루넬레스키는 돔 기초에 나무와 철로 된 수평 팽팽한 사슬을 만들어 돔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의 무게는 37,000톤에 달하고,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특수한 기계를 만들었으며, 그의 탁월한 석공 기술은 건축에 있어서 극적인 공헌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조수로 임명된 기베르티는 이 계획을 무시하고 비난했다. 크게 공격받은 브루넬레스키는 아픈 척하면서 로마로 떠나 기베르티에게 계획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기베르티는 곧 전체 계획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시인했다. 1423년,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독점적인 책무를 인계받았다.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1436년 3월 2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대성당을 축성(祝聖)하였다. 이 돔은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목재 지지 구조 없이 지어졌으며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돔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으로 남아 있으며, 르네상스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5. 1. 설계 공모와 브루넬레스키의 당선
15세기 초, 대성당의 원통형 부분은 건설되었지만, 성단소 위 42m 넓이의 공간에는 1367년부터 벽돌 모형이 있었음에도 팔각형 돔(쿠폴라)이 없었다. 1419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는 돔 설계 공모전을 열었다. 로렌초 기베르티와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주요 경쟁자였고,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를 의뢰받았다.[65]1418년 8월 19일,[9] 아르테 델라 라나는 돔 건설을 위한 건축 설계 경쟁을 발표했다.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주요 경쟁자였고, 브루넬레스키가 승리하여 의뢰를 받았다.[10] 공동 감독으로 임명된 기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같은 급여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프로젝트에 할애했다. 브루넬레스키가 아팠을 때, 프로젝트는 잠시 기베르티에게 넘어갔지만, 기베르티는 곧 프로젝트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인정했다. 1423년, 브루넬레스키가 다시 책임을 맡아 단독으로 책임을 졌다.[11]
14세기 말부터 돔 구조물 건설이 우려되었지만, 1410년에는 중앙 상부에 드럼(돔의 기저부)이 축조되어 높이가 55m에 달했고, 공사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기록에는 1417년까지 다양한 인물에 의한 도면과 모형 교환이 남아 있다. 1418년8월 19일, 돔 모형 공모 포고가 이루어져 로렌초 기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난니 디 반코의 안이 응모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독립된 이중 구조를 가진 돔을 가설틀 없이 쌓는 안을 제출했고, 최종적으로 그의 안이 채택되었다. 1420년4월 16일, 브루넬레스키는 공사 책임자로 임명되었지만, 기베르티와 바티스타 단토니오도 건설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2. 5. 2. 브루넬레스키의 혁신적인 설계와 기술
15세기 초, 대성당의 원통형 부분은 건설되었지만, 성단소 위 42m 넓이 공간에는 팔각형 돔(쿠폴라)이 없었다. 1419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는 돔 설계 공모전을 열었고,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주요 경쟁자였다.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를 의뢰받았다.[65]돔 건설은 많은 기술적 문제를 야기했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콘크리트 사용법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는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의 도움으로 나무와 벽돌 모형을 만들어(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 장인들에게 지침을 주었지만, 건설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독창적이었다. 지붕 위가 아닌 드럼에 얹혀진 이중벽 구조의 8각 돔으로, 지면에서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 건설할 수 있었으며, 홍예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었다.[65] 돔의 기초에는 나무와 철로 된 수평 팽팽한 사슬을 만들어 안전을 확보했다.
이 구조물은 무게가 37,000톤이고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특수 기계를 만들었고, 그의 석공 기술은 건축에 크게 기여했다. 이중벽 안 원뿔 표면 위 원을 베끼는 능력은 스스로 지탱하는 수평 아치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기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조수로 임명되었으나 계획을 비난했고, 브루넬레스키는 아픈 척하며 로마로 떠나 기베르티에게 계획을 넘겼다. 그러나 기베르티는 자신의 능력 부족을 인정했고, 1423년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독점적인 책무를 맡았다.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6년 3월 25일 대성당을 축성(祝聖)하였다. 이 돔은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진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이었고,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르네상스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꼽힌다.
브루넬레스키는 돔 위에 랜턴을 올리기 위해 또 다른 설계 경기에 참가하여 기베르티와 안토니오 차케리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는 팔각형 랜턴을 디자인했고, 건설은 1446년 브루넬레스키 사망 직전 시작되었다. 랜턴은 미켈로초가 1461년 완성했다. 원뿔 형태 천장에는 도금된 구리 공과 십자가가 씌워졌는데, 베로키오가 1469년 완성했다. 돔과 랜턴의 총 높이는 114.5m이다. 구리 공은 1600년 7월 17일 벼락으로 떨어졌고, 2년 뒤 더 큰 것으로 교체되었다.
바치오 다뇰로가 맡은 드럼 갤러리 장식은 미켈란젤로의 반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상은 대성당 광장 카노니치 궁전 밖에 앉아 자신의 돔을 바라보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이 돔의 규모를 150년 후에 뛰어넘게 된다.
14세기 말부터 돔 구조물 건설이 우려되었지만, 1410년에는 중앙 상부에 드럼(돔의 기저부)이 축조되어 높이가 55m에 달했고, 공사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418년8월 19일, 돔 모형 공모가 발표되어 로렌초 기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난니 디 반코의 안이 응모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독립된 이중 구조 돔을 가설틀 없이 쌓는 안을 제출했고,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1420년4월 16일, 브루넬레스키는 공사 책임자로 임명되었지만, 기베르티와 바티스타 단토니오도 건설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1420년8월 7일 건설이 시작되어 1434년8월 30일 돔 정상부 원환이 닫히면서 완성되었다. 1436년3월 25일 교황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봉헌식이 거행되었다(이 봉헌식에서 기욤 뒤파이 작곡 모테트 「장미가 피는 무렵」이 연주되었다). 이 돔은 나무 가설틀을 만들지 않고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돔이며, 건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돔을 완성했지만, 정상부 큐폴라에 대해서는 1436년12월 31일 승인된 디자인만으로 건축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큐폴라를 얹는 방법에 대한 콘테스트가 실시되었고,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설계가 채택되어 대성당 주임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1446년3월 13일 건설이 시작되어 1461년에 완성되었다.
천개 천정에 있는 청동제 구체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가 제작했다. 당시 베로키오의 제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기계에 매료되어 스케치에 그려 칭찬했다.[54]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청동 구체 디자인에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55]
2. 5. 3. 돔 건설 과정과 완성
15세기 초, 대성당의 원통형 부분은 건설되었지만, 성단소 위 42m 넓이의 공간에는 팔각형 돔(쿠폴라)이 없었다. 1419년 아르테 델라 라나(양모 상인 길드)는 돔 설계 공모전을 열었고,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주요 경쟁자였다. 이 대회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를 의뢰받았다.[65]석재 돔 건설은 많은 기술적 문제를 야기했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콘크리트 사용법은 잊혀진 상태였다. 그는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의 도움으로 나무와 벽돌 모형을 만들어(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 장인들에게 지침을 제공했지만, 건설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독창적이었다. 그는 지붕이 아닌 드럼 위에 얹혀진 이중벽 구조의 팔각형 돔을 설계하여, 지면에서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 돔 전체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홍예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었다.[65] 돔의 안전을 위해, 브루넬레스키는 돔 기초에 나무와 철로 된 수평 팽팽한 사슬을 만들었다.
이 구조물의 무게는 37,000톤이고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특수 기계를 만들었고, 그의 석공 기술은 건축에 크게 공헌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조수로 임명된 기베르티는 계획을 비난했고, 브루넬레스키는 아픈 척하며 로마로 떠나 기베르티에게 계획을 넘겼다. 그러나 기베르티는 자신의 능력 부족을 인정했고, 1423년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독점적인 책무를 맡았다.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6년 3월 25일 대성당을 축성(祝聖)하였다. 이 돔은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목재 지지 구조 없이 지어졌고,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14세기 말부터 돔의 구조물 건설이 우려되었지만, 1410년에는 중앙 상부에 드럼(돔의 기저부)이 축조되었기 때문에 높이는 55m에 달했고, 공사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기록에는 1417년까지 다양한 인물에 의한 도면과 모형의 교환이 남아 있다. 1418년8월 19일, 돔 모형 공모가 발표되어 로렌초 기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난니 디 반코의 안이 응모되었다. 당시 건축 기술로는 돔을 쌓으려면 거대한 발판과 가설틀이 필요하여 매우 어려웠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독립된 이중 구조를 가진 돔을 가설틀 없이 쌓는 안을 제출했다. 이중 구조는 무게가 증가하여 위험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브루넬레스키의 안이 채택되었다. 1420년4월 16일, 브루넬레스키는 공사 책임자로 임명되었지만, 그의 기량을 우려하는 의견 때문에 기베르티와 바티스타 단토니오도 건설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1420년8월 7일, 건설이 시작되어 1434년8월 30일에는 돔 정상부의 원환이 닫히면서 완성을 보았다. 1436년3월 2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대성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이 봉헌식에서 기욤 뒤파이 작곡의 모테트 「장미가 피는 무렵」이 연주되었다). 이 돔은 나무 가설틀을 만들지 않고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돔이며, 건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브루넬레스키는 돔을 완성했지만, 정상부의 큐폴라에 대해서는 1436년12월 31일에 승인된 디자인만으로 건축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따라서 새롭게 큐폴라를 얹는 방법에 대한 콘테스트가 실시되었다. 여기에는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설계가 채택되어, 그는 대성당 주임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브루넬레스키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446년3월 13일에 건설이 시작되어 1461년에 완성되었다.
2. 5. 4. 랜턴 건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돔 위에 랜턴(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첨탑)을 올리는 설계를 두고 로렌초 기베르티, 안토니오 차케리와 경쟁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팔각형 랜턴에 사방으로 뻗은 버트레스와 여덟 개의 높은 아치 창을 디자인했으며, 이 디자인은 현재 대성당 부속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65] 1446년 브루넬레스키 사후 몇 달 전부터 랜턴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여러 건축가들이 설계를 변경하면서 15년간 진척이 더뎠다. 1461년 미켈로초가 랜턴을 완성했고, 1469년 베로키오가 원뿔형 천장에 성 유물을 포함한 도금된 구리 공과 십자가를 씌웠다.[65] 돔과 랜턴의 총 높이는 114.5m이다. 1600년 7월 17일 벼락으로 구리 공이 떨어졌으나, 2년 뒤 더 큰 것으로 교체되었다.[65]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랜턴 위 구리 공 설치 작업을 맡았는데, 당시 그의 작업실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수습생으로 있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기계에 영감을 받은 베로키오는 구리 공을 들어 올리는 기계를 만들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기계의 스케치를 여럿 그려 레오나르도의 발명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66]
2. 6. 전면(파사드)의 역사
피렌체 대성당의 전면(파사드)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했으며, 조토의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토가 사망하고 20년 후에 착공되었다. 15세기 중반에 그려진 베르나르디노 포체티의 스케치(1587) 등 초기 전면 스케치는 대성당 부속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초기 전면은 안드레아 오르카냐와 타데오 가디 등 여러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지만, 아랫부분만 완성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1587년에서 1588년 사이,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명령으로 베르나르도 부오탈렌티가 이 전면을 철거했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철거된 전면의 조각들 대부분은 대성당 뒤편의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나머지는 베를린 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새로운 전면 설계를 위한 현상설계는 큰 부패 사건으로 이어졌다. 부오탈렌티의 나무 모형은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새로운 모형이 제안되었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전면은 19세기까지 장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864년, 새로운 전면 디자인을 위한 공모전이 열렸고, 1871년에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의 설계안이 당선되었다. 1876년에 시작된 공사는 1887년에 완료되었다. 흰색, 초록색, 붉은색 대리석으로 된 이 네오 고딕 양식의 전면은 대성당, 종탑, 세례당과 조화를 이루지만, 과도하게 장식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2. 6. 1.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원래 전면
원래의 전면(파사드)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디자인했으며, 일반적으로 조토의 공적으로 알려져 있다. 전면 제작은 조토가 사망한 지 20년 후에 시작되었다. 15세기 중반 펜과 잉크로 된 전면 스케치(조토의 전면이라고 불렸던)는 코덱스 루스티치(''Codex Rustici'')에서 시작되었고, 베르나르디노 포체티의 스케치(1587)가 있는데 이 둘 다 대성당 부속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면은 안드레아 오르카냐와 타데오 가디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의 예술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맨 처음의 전면은 아랫부분만 완성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이 전면은 1587년에서 1588년에 피렌체의 메디치 궁정의 건축가인 베르나르도 부오탈렌티가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명령으로 분해했는데, 이는 전면 부분이 르네상스 시대와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원래 있던 조각들 대부분은 대성당 뒤에 있는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머지 것들은 현재 베를린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6. 2. 전면의 철거와 재건 시도
원래 전면(파사드)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디자인했으며, 일반적으로 조토의 공으로 알려져 있다. 전면 제작은 조토 사후 20년 뒤에 시작되었다. 15세기 중반의 펜과 잉크로 된 전면 스케치(조토의 전면이라 불림)는 코덱스 루스티치(''Codex Rustici'')에서 시작되었고, 베르나르디노 포체티의 스케치(1587)가 있으며, 이 둘은 모두 대성당 부속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면은 안드레아 오르카냐와 타데오 가디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집대성한 것이다. 최초의 전면은 아랫부분만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미완성이었다. 1587~1588년, 피렌체 메디치 궁정 건축가 베르나르도 부오탈렌티가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명으로 이 전면 부분을 분해했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와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조각 대부분은 대성당 뒤편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머지는 현재 베를린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면 재설계 현상설계는 큰 부패 사건으로 변질되었다. 부오탈렌티의 나무 정면 모형은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 몇 년간 조반니 안토니오 도시오, 조반니 데 메디치, 알레산드로 피에로니, 잠볼로냐 등의 새로운 모형이 제안되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면은 19세기까지 장식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1864년 대성당의 새 전면에 대한 현상설계가 열렸고,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1808-1883)의 설계안이 1871년에 당선되었다. 공사는 1876년에 시작되어 1887년에 완료되었다. 흰색, 초록색, 붉은색 대리석으로 된 이 네오 고딕 양식 전면은 대성당, 종탑, 세례당과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 그러나 이 전면이 과도하게 장식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전체 전면은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2. 6. 3.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의 신고딕 양식 전면
1864년 대성당의 새로운 전면(파사드) 디자인을 위한 공모전이 열렸고, 1871년에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1808~1883)의 설계안이 당선되었다. 공사는 1876년에 시작되어 1887년에 완료되었다. 흰색, 녹색, 붉은색 대리석으로 된 이 신고딕 양식의 전면은 대성당, 종탑, 세례당과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도록 디자인되었다. 그러나 이 전면이 과도하게 장식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전체 전면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졌다.
3. 주요 입구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제작된 세 개의 거대한 청동 문에는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묘사한 장면들이 장식되어 있다.[3] 각 문 위에 있는 아치형 장식(루네트)의 모자이크는 니콜로 바라비노가 디자인했으며, 왼쪽부터 '피렌체 자선 기관 설립자들 사이의 자애', '세례자 요한과 함께 즉위한 그리스도', '피렌체의 장인, 상인, 인문주의자'를 묘사한다. 중앙 문 위 박공에는 티토 사로키가 제작한 '꽃으로 장식된 홀을 들고 즉위한 성모 마리아' 반조각상이 있다.[3] 오른쪽 문은 주세페 카시오리가 조각했다.
4. 내부
피렌체 대성당의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넓지만 텅 빈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강조한 종교적 엄격함을 반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장식들이 사라지거나 두오모 미술관으로 옮겨졌는데, 루카 델라 로비아와 도나텔로의 위대한 작품인 성가대석도 그중 하나이다.
대성당에는 피렌체의 저명인사와 군사 지도자들을 기리는 예술 작품들이 있다.
-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의 ''단테와 피렌체 도시''(1465): 단테의 신곡 장면 외에도 1465년 당시 피렌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 파올로 우첼로의 ''존 호크우드의 묘비''(1436): 단색에 가까운 프레스코화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의 기마상''(1456): 앞선 작품과 같은 스타일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두 작품 모두 콘도티에로를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 조토, 브루넬레스키, 마르실리오 피치노, 안토니오 스콰르치알루피의 흉상: 모두 15세기와 16세기에 제작되었다.
정문 위에는 파올로 우첼로가 그린 네 명의 복음사가 초상화가 있는 거대한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이탈리아 시각'(''hora italica'')의 24시간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시계 중 하나이다.[36]
대성당은 44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유명하며, 이는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업이었다. 측랑과 횡단부 창에는 성경 속 성인들이, 돔의 원통형 창과 입구 위 원형 창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이다.[36]
- 가도 가디가 디자인한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여왕으로 즉위시키는 장면'' (14세기 초)
- 도나텔로가 디자인한 돔 드럼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성모 승천'')
피렌체 주교 안토니오 도르소(1323)의 묘비는 티노 다 카마이뇨의 작품이다. 제단 뒤 주교 의자에는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의 십자가(1495-1497)가 있고, 성가대 칸막이는 바르톨로메오 반디넬리의 작품이다. 성구실의 청동문과 테라코타 작품 2개는 루카 델라 로비아의 것이다.[36]
세 후진 중앙 뒤에는 성 제노비오의 제단이 있다. 기베르티의 은 성궤에는 성 제노비오의 유물이 있으며, 중앙부에는 그의 기적이 묘사되어 있다. 성궤 위에는 조반니 발두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다. 몬테 디 조반니의 모자이크 패널 ''성 제노비우스의 흉상''은 현재 두오모 미술관에 있다.[36]
16세기 바초 다뇰로와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가 제작한 색채 대리석 바닥 등 많은 장식이 있다. 파사드 대리석 조각 일부는 거꾸로 바닥에 사용되었다.[36]
돔 천장은 ''최후의 심판''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결정으로 조르조 바사리가 시작하고 페데리코 추카리가 완성했다.[48]





4. 1. 건축 구조
피렌체 대성당은 네이브와 두 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로마 십자가 형태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다. 중랑과 두 개의 측랑은 벽 기둥과 그에 붙어 있는 넓은 첨두 아치(끝이 뾰족한 아치)로 나뉘었는데, 이는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었다.이 대성당은 153m의 길이, 38m에서 90m에 이르는 폭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측랑에서 아치까지의 높이는 23m이고, 바닥에서 돔 위 랜턴의 열린 부분까지의 높이는 90m에 이른다.
고딕적인 실내는 광대하고 비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설교한 것처럼 종교적 엄격함에 대응한다.
대성당 내부의 많은 장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분실되거나 루카 델라 로비아나 도나텔로의 위대한 작품인 성가대석의 연단 등과 같은 작품들은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대성당이 공공기금으로 지어지기는 했지만, 이 건물에는 피렌체의 저명한 인물들이나 군사 지도자들을 찬미하는 예술 작품들도 있다. 이들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 | 작가 | 제작 연도 | 특징 |
---|---|---|---|
단테의 신곡 |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 1465년 | 단테가 생전에 결코 볼 수 없었던 1465년대 피렌체를 보여준다. |
호크우드 경의 기마상 | 파올로 우첼로 | 1436년 | 단색에 가까운 프레스코화로 “terra verde”라는 오래된 청동과 가까운 색으로 칠해졌다. 19세기에 캔버스로 옮겨졌다. |
니콜로 다 톨렌티노의 기마상 |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 1456년 | 19세기 캔버스에 옮겨진 이 프레스코화는 호크우드 경의 기마상과 같은 양식에 속하며, 대리석에 가까운 색으로 칠해졌다. 앞의 작품에 비해 장식이 풍부하며 운동감 역시 두드러진다. |
조토의 흉상(베네데토 다 마이아노 작), 브루넬레스키의 흉상 (부지아노, 1447),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안토니오 스콰르치알루피(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의 흉상도 있는데, 이 흉상들은 모두 15세기에서 16세기 것이다.
정문 위에는 거대한 시계가 있는데, 시계의 네 모서리에는 파올로 우첼로가 1443년에 그린 네 명의 복음사가(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프레스코 초상화가 있다. 바늘이 하나인 이 전례 시계는 24시에 해가 질 때 끝나는 시간 주기인 “이탈리아 시각”(''hora italica'')의 24시간을 보여준다. 이 시간표는 18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이 시계는 당시 만들어져 아직도 작동하는 몇 안 되는 시계 가운데 하나이다.
피렌체 대성당은 특히 마흔네 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유명한데, 이것을 만드는 것은 14세기와 15세기 이탈리아의 스테인드글라스 제조 가운데 가장 큰 사업이었다. 측랑 안과 익랑 안의 창들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돔의 원통형 안과 출입구 위에 있는 둥근 창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당시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시계 위에 있는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창인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시는 그리스도》는 풍부한 색채를 지니고 있으며, 가도 가디가 14세기 초반에 고안했다.
도나텔로는 돔의 원통형 안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동정 마리아의 대관식》)을 고안했다(신랑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창).
피렌체 교구장이었던 안토니오 오르소의 장례 기념물(1323)은 티노 다 카마이노의 작품으로, 티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장례 조각가였다.
중앙 제대에 있는 주교좌 뒤에 있는 십자고상은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1495-1497)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성가대석은 바르톨로메오 반디넬리의 작품이다. 열 개의 판으로 된 청동 문은 루카 델라 로비아의 작품으로, 그는 또한 제의실 안에 광택을 낸 두 개의 테라코타상을 만들었다. 두 작품의 이름은 각각 《촛대를 든 천사》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세 후진의 중앙 뒤쪽에는 피렌체 최초의 주교인 성 제노비오의 제대가 있다. 이 은으로 된 성소는 기베르티의 걸작으로 성 제노비오의 성유물이 들어 있는 항아리가 이 안에 있다. 중앙부의 구획은 죽은 어린이를 되살린 그의 기적을 보여준다. 이 성소 위에는 조반니 발두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다. 여기에는 또한 16세기의 세밀화가 몬테 디 조반니의 작품인 유리를 붙여 만든 모자이크 패널화가 있었지만, 현재는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피렌체 공의 후원 아래 만들어진 색채가 있는 대리석 바닥과 같은 16세기의 많은 장식은 바초 다뇰로와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1520-26)의 작품이다. 전면에 있던 대리석의 조각들은 뒤집어서 바닥에 사용되었다. (1966년 홍수 이후 바닥을 복원하다가 발견됨)
처음에는 대부분 빛이 랜턴을 통해 드럼의 둥근 창으로 들어오도록 45m 폭의 돔의 실내장식은 모자이크 장식으로 덮을 예정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찬란한 금과 함께 둥근 천장이 희미하게 빛나야 한다고 했지만, 1446년 그의 죽음으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돔 내부는 하얀색으로 칠해졌다. 피렌체의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는 돔에 ''마지막 심판''의 그림을 묘사하도록 결정했다. 3600m2의 넓이에 채색할 이 방대한 작업은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가 1568년에 시작했으며, 1579년까지 계속되었다. 랜턴에서 가까운 위쪽 부분은 ''요한 묵시록 4장의 스물네 명의 장로''를 묘사한 것으로 1574년 바사리가 자신이 죽기 전에 완성했다. 페데리코 추카리와 도메니코 크레스티와 같은 그 협력자들은 다른 부분들을 완성했는데 그 작업은 아래와 같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들》, 《덕》, 《성령의 선물들》, 《더없는 행복》, 그리고 돔의 맨 아랫부분에는 《중대한 죄와 지옥》이 있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추카리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로 꼽힌다. 그러나 작품의 질은 시기별 예술가의 수급과 그들의 서로 다른 기교들 때문에 균질하지 않다. 바사리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프레스코(''buon fresco'')” 기법으로 그렸지만, 추카리는 회반죽이 마른 후 그리는 “프레스코-세코(''Fresco-secco'')” 기법으로 그렸다.
4. 2. 내부 장식과 예술 작품
피렌체 대성당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넓지만 텅 빈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강조한 종교적 엄격함을 반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장식들이 사라지거나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대표적으로 루카 델라 로비아와 도나텔로의 성가대석이 있다.
대성당은 공공 기금으로 지어졌지만, 피렌체의 유명 인사나 군사 지도자를 기리는 예술 작품들도 있다.[36]
-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의 ''단테와 피렌체 도시''(1465): 단테가 신곡의 장면과 함께 1465년 당시 피렌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 파올로 우첼로의 ''존 호크우드의 묘비''(1436): 단색에 가까운 프레스코화로, 청동의 녹청색(''테라 베르데'')으로 그려졌다.
-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의 기마상''(1456): 대리석과 비슷한 색으로 그려졌으며, 앞선 작품보다 화려하고 움직임이 잘 표현되어 있다. 두 프레스코화 모두 용병대장을 영웅적으로 묘사했지만, 원근법 적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 조토, 브루넬레스키, 마르실리오 피치노, 안토니오 스콰르치알루피의 흉상: 모두 15~16세기에 제작되었다.
정문 위에는 파올로 우첼로가 1443년에 그린 네 복음사가(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프레스코 초상화가 있는 거대한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이탈리아 시각'(''hora italica'')의 24시간을 보여주는 독특한 방식으로, 해 질 녘이 24시가 된다.[36]
피렌체 대성당은 44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유명하며, 이는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이었다. 측랑과 익랑의 창에는 구약/신약 성경 인물들이, 돔의 원통형 창과 출입구 위 둥근 창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이다.[36]
가도 가디가 14세기 초에 디자인한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시는 그리스도''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풍부한 색채를 자랑한다. 도나텔로는 돔 원통형 창의 ''동정 마리아의 대관식''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디자인했다.
티노 다 카마이뇨가 제작한 피렌체 교구장 안토니오 도르소의 장례 기념물(1323)이 있다. 중앙 제대 뒤 주교좌 뒤에는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의 십자고상(1495-1497)과 바르톨로메오 반디넬리의 성가대석이 있다. 루카 델라 로비아의 청동 문과 제의실 안 테라코타상(《촛대를 든 천사》, 《그리스도의 부활》)도 주목할 만하다.[36]
세 후진 중앙 뒤에는 피렌체 최초 주교 성 제노비오의 제대가 있다. 기베르티의 은 성소에는 성 제노비오의 유물이 있으며, 중앙부에는 그의 기적(죽은 아이 소생)이 묘사되어 있다. 위에는 조반니 발두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다. 16세기 세밀화가 몬테 디 조반니의 모자이크 패널화는 현재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있다.[36]
16세기 바초 다뇰로와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가 제작한 색채 대리석 바닥 등 많은 장식이 있다. 전면 대리석 조각 일부는 뒤집혀 바닥에 사용되었다.[36]
돔 하부에는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가 1568년부터 1579년까지 그린 ''마지막 심판'' 프레스코화가 있다. 3,600m2 넓이의 이 작품은 코시모 1세의 결정으로 시작되었다. 윗부분 ''요한 묵시록 4장의 스물네 명의 장로''는 바사리가, 나머지(《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 《덕》, 《성령의 선물들》, 《더없는 행복》, 《중대한 죄와 지옥》)는 추카리와 협력자들이 완성했다. 바사리는 "프레스코(''buon fresco'')" 기법, 추카리는 "프레스코-세코(''Fresco-secco'')" 기법을 사용했다.
4. 3. 스테인드글라스 창
피렌체 대성당은 14세기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사업이었던 마흔네 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유명하다. 측랑과 익랑 안의 창들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돔의 원통형 안과 출입구 위에 있는 둥근 창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당시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다.[36]시계 위에 있는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창인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시는 그리스도》는 풍부한 색채를 지니고 있으며, 가도 가디가 14세기 초반에 고안했다.
도나텔로는 돔의 원통형 안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동정 마리아의 대관식》)을 고안했다(본당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창).
로렌초 기베르티 등은 1432년부터 1445년에 걸쳐 드럼에 스테인드글라스 '성모 승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그리스도의 봉헌'을 제작하였다. ('성모 승천'은 1442년 7월 13일부터 1443년 9월 11일에 제작.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1443년 9월 11일에 보수 지불 기록이 있음. '그리스도의 봉헌'의 보수 기록은 1443년 12월 7일)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파올로 우첼로 등은 1438년부터 1445년에 걸쳐 드럼의 스테인드글라스 '수태고지', '탄생', '부활', '승천' 등을 제작하였다.
4. 4. 기타 주요 장식
피렌체 대성당의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넓지만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강조한 종교적 엄격함을 반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장식들이 사라지거나 두오모 미술관으로 옮겨졌는데, 루카 델라 로비아와 도나텔로의 성가대석도 그중 하나이다.대성당에는 피렌체의 저명인사와 군사 지도자들을 기리는 예술 작품들이 있다.

- 파올로 우첼로의 ''존 호크우드의 묘비'' (1436): 단색에 가까운 프레스코화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의 기마상'' (1456): 앞선 작품과 같은 스타일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두 작품 모두 콘도티에로를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 조토, 브루넬레스키, 마르실리오 피치노, 안토니오 스쿠아르치알루피의 흉상: 모두 15세기와 16세기에 제작되었다.
정문 위에는 파올로 우첼로가 그린 네 명의 복음사가 초상화가 있는 거대한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이탈리아 시각''(''hora italica'')의 24시간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시계 중 하나이다.[36]
대성당은 44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유명하며, 이는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업이었다. 측랑과 횡단부 창에는 성경 속 성인들이, 돔의 드럼과 입구 위 원형 창에는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파올로 우첼로,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등 피렌체 예술가들의 작품이다.[36]
- 가도 가디가 디자인한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여왕으로 즉위시키는 장면'' (14세기 초)
- 도나텔로가 디자인한 돔 드럼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성모 승천'')
피렌체 주교 안토니오 도르소(1323)의 묘비는 티노 다 카마이뇨의 작품이다.
제단 뒤 주교 의자에는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의 십자가(1495-1497)가 있고, 성가대 칸막이는 바르톨로메오 반디넬리의 작품이다. 성구실의 청동문과 테라코타 작품 2개는 루카 델라 로비아의 것이다.[36]
세 후진 중앙 뒤에는 성 제노비오의 제단이 있다. 기베르티의 은 성궤에는 성 제노비오의 유물이 있으며, 중앙부에는 그의 기적이 묘사되어 있다. 성궤 위에는 조반니 발두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다. 몬테 디 조반니의 모자이크 패널 ''성 제노비우스의 흉상''은 현재 두오모 미술관에 있다.[36]
16세기 대공의 후원으로 제작된 대리석 바닥은 바치오 다냐뇨와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의 작품이다. 파사드 대리석 조각 일부는 거꾸로 바닥에 사용되었다.[36]
돔 천장은 ''최후의 심판''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대공의 결정으로 조르조 바사리가 시작하고 페데리코 추카리가 완성했다.[48] 바사리는 ''진짜 프레스코'' 기법을, 주카리는 ''세코 방식''으로 그렸다.
4. 5. 돔 내부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
처음에는 빛이 랜턴을 통해 드럼의 둥근 창으로 들어오도록 45m 폭의 돔 실내 장식을 모자이크로 덮을 예정이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둥근 천장이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야 한다고 했지만, 1446년 그의 죽음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돔 내부는 하얀색으로 칠해졌다. 토스카나의 코시모 1세 대공은 돔에 ''최후의 심판'' 그림을 묘사하도록 결정했다. 3,600m2 넓이에 채색하는 이 방대한 작업은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추카리가 1568년에 시작하여 1579년에 완료했다.[56] 랜턴 가까이 위쪽 부분은 ''요한의 묵시록 4장에 나오는 스물네 명의 장로''를 묘사한 것으로, 1574년 바사리가 죽기 전에 완성했다. 페데리코 추카리와 도메니코 크레스티 같은 협력자들은 (위에서 아래로) 《천사들의 합창》,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 《덕》, 《성령의 선물》, 《더없는 행복》, 그리고 돔 맨 아랫부분에는 《중대한 죄와 지옥》을 완성했다. 이 프레스코화는 추카리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지만, 시기별 예술가 수급과 서로 다른 기교 때문에 작품의 질은 균일하지 않다. 바사리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프레스코(''buon fresco'') 기법으로 그렸지만, 추카리는 회반죽이 마른 후 그리는 프레스코-세코(''Fresco-secco'') 기법으로 그렸다.5. 지하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피렌체 대성당 지하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로마 시대 가옥의 흔적, 초기 기독교 시대의 포장도로, 이전에 있었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폐허와 이후 이어진 교회의 확장 흔적들이 발견되어 이 지역의 고고학적 역사가 재구성되었다.[63]
지하실 입구 근처에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무덤이 있다.[64] 무덤 자체는 소박하지만, 눈에 잘 띄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6. 천문학적 관측
1475년, 이탈리아 천문학자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브루넬레스키의 수학 교사이기도 했음)는 피렌체 대성당 돔에 구멍을 뚫어 자오선을 만들었다. 이 구멍은 바닥에서 91.05m 높이에 있었다.[39] 이 높이 때문에 대성당 바닥에 완벽한 자오선을 설치할 수는 없었지만, 제단과 트랜셉트 북쪽 벽 사이에 약 10m 길이의 짧은 구간을 만들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하지 전후 약 35일 동안 관측이 가능했다.
건물 침하와 외부 온도 변화로 인해 자오선은 천문학적 가치가 제한적이었고, 1755년 레오나르도 시메네스에 의해 복원될 때까지 사용되지 않았다.[40]
자오선은 1894년 ''fabbricieri''에 의해 덮였다가 1997년에 다시 공개되었다. 매년 6월 21일 12시(UT)에 관측 재현 행사가 열린다.
7. 기타 매장
- 제노비오[5]
- 콘라트 2세
- 조반니 베넬리
-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1]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대성당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프랭클린 토커의 연구를 통해 로마 시대 주택의 흔적, 초기 기독교 시대의 포장 도로, 산타 레파라타의 이전 대성당 유적 등이 발견되었다. 입구 근처에는 브루넬레스키의 묘가 있는데, 묘 자체는 소박하지만 그 위치는 피렌체 사람들이 그에게 얼마나 큰 존경을 표했는지를 보여준다.
8. 돔의 균열
브루넬레스키가 돔 건설에 사용한 무보강 석조물은 인장력에 약해 균열이 발생하기 쉬웠다. 이 재료는 이종성과 서로 다른 재료 사이의 많은 표면 때문에 지진 하중으로 인한 손상에도 취약했다.[41]
돔의 균열은 건설 완료 전에도 관찰되었다. 최초의 균열은 1453년 강력한 지진으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42] 1639년 9월 18일자 게라르도 실바니(Gherardo Silvani)의 보고서에는 균열이 "peli"("머리카락")처럼 가늘다고 기록되어 있다.[42] 1694년 지암바티스타 넬리(Giambattista Nelli)와 빈첸초 비비아니(Vincenzo Viviani)는 균열을 조사하여 최대 너비 29mm의 주요 균열 두 개를 발견했다.[42] 이들은 균열의 원인이 돔의 무게와 그로 인한 기둥에 대한 수평 추력이라고 판단했다. 1695년, 빈첸초 비비아니가 이끄는 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균열이 건물의 자중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돔을 강화하기 위해 네 개의 큰 철 띠를 설치하는 것이 제안되었으나, 긴 논쟁 끝에 돔을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47]
1757년 예수회 사제 레오나르도 시메네스(Leonardo Ximenes)는 13가지의 다른 균열 유형을 설명하는 최초의 균열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42][44] 1934년 피에르 루이지 너비(Pier Luigi Nervi)는 계절에 따라 균열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관찰했다. 겨울에는 돔의 돌과 벽돌이 수축하여 균열이 넓어지고, 여름에는 재료가 팽창하여 균열이 닫혔다. 현대 건물은 설계상 팽창 조인트를 포함하지만, 피렌체 대성당 돔에는 팽창 조인트가 없어 이러한 균열 형태로 자체 팽창 조인트가 개발되어 구조물이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 돔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지는 않았다.[45]
1955년부터 2009년까지 두오모 작품(Opera del Duomo)은 22개의 기계식 변형 측정기를 설치하여 내부 돔의 주요 균열 너비 변화를 기록하고, 돔 내외부 온도도 함께 기록했다.[46] 1975년 이탈리아 정부는 돔 보호 위원회를 임명했고,[47] 1978년 정부 문화 기관은 프레스코화 복원을 결정했다. 1982년, 프레스코화 복원 작업을 위한 비계를 설치하기 위해 브루넬레스키가 돔 기부에 남긴 48개의 600mm 구멍에 콘크리트를 채웠다.[47][48]
1985년, 현지 건축가 란도 바르톨리(Lando Bartoli)는 밀봉된 구멍 주변에 추가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발견했다. 돔 기부의 질량이 48개의 구멍을 채우고 있는 굳은 콘크리트에 부딪혀 균열이 돔 상부 영역으로 전달된다는 이론이 제기되었다.[45][48] 그러나 안드레아 키아루지(Andrea Chiarugi), 미켈레 파넬리(Michele Fanelli), 주세페티(Giuseppetti)의 분석(1983년 발표)에 따르면 균열의 주요 원인은 돔의 기하학적 형태, 무게(약 25,000톤)[48], 링 빔의 저항 불량으로 인한 자중 효과였으며, 열 변화는 피로 하중을 유발하여 구조물의 팽창을 초래했다.[49][41] 1985년 이탈리아 문화유산부가 설립한 위원회는 이 이론을 받아들였다.[43][44]
1984년에 완료된 조사에서는 "A"부터 "D"까지의 문자로 식별된 범주로 분류된 총 493개의 균열이 발견되었다.[45]
- A형: 링 빔에서 시작하여 돔 높이의 약 3분의 2까지 이어지는 주요 균열. 짝수 웹의 내부 및 외부 층을 모두 통과하며 두께는 55mm~60mm(웹 4 및 6) 및 25mm~30mm(웹 2 및 8)이다.[44] 돔에는 대성당의 주랑을 향하는 1번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번호가 매겨진 8개의 웹이 있으며, 이 웹은 돔을 사분면으로 나눈다. 이 균열은 여름에도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45]
- B형: 원형 창문 근처에 있는 작은 균열.[44]
- C형: 돔의 여덟 개 가장자리 주변에 있는 작은 균열.[44]
- D형: 홀수 웹 내부에 있는 작은 균열. 돔의 너비를 통과하지 않는다.[44]
모두 대칭적인 패턴으로 형성되었다. "A"형 균열의 발달은 돔이 상부 오쿨루스 아래에서 연결된 네 개의 표류하는 반원형 아치로 영구적으로 작용함을 의미한다.[44]
1987년, ISMES는 돔 모니터링 시스템을 설치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위치에서 석조물과 공기 온도를 측정하는 60개의 온도계, 내부 및 외부 돔의 주요 균열의 다양한 수준에서 72개의 유도형 변위 변환기(변형 측정기), 각 웹 중앙에 있는 8개의 수직선, 8개의 수위계와 2개의 압력계가 포함되었다.[46] 기록된 데이터의 선형 회귀 분석에 따르면 주요 균열은 한 세기에 약 3mm씩 넓어지고 있다.[46][42] 다른 자료에서는 5.5mm의 움직임을 언급하고 있다.[50]
1980년, 이탈리아 전력청과 구조 및 수력 연구 센터(CRIS)의 협력으로 돔의 컴퓨터 모델이 개발되었다. 제한된 컴퓨팅 리소스와 대칭성을 고려하여 돔의 4분의 1만 모델링되었다. 유한 요소 분석 결과 주요 균열은 본질적으로 돔의 자중에 의해 생성됨이 확인되었다. 그 이후로 점점 더 복잡해지는 일련의 수치 모델이 개발되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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